2005년 3월 5일
최양일 감독의 영화가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기대를 하다가 결국 보게 되었다.
처음 최양일 감독의 영화를 접하게 된 것은
재일한국인의 현주소를 묻는 영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였다.
광기어린 사랑과 집착을 주제로 한 '감각의 제국'이란 걸출한 문제작을 만든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조감독,
그리고 키타노 다케시의 오랜 친구.
재일동포면서도 한국이름을 떳떳하게 밝히며 일본 영화판을 이끌어 온 의지있는 감독.
이런 감독이기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최양일 감독과 기타노 다케시 주연 만으로도 큰 기대를 하고 볼 생각이었다.
키타노 다케시는 두 편의 영화로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물론 그 외에도 많지만)
'소나티네'와 '모두 하고있습니까'라는 영화.
그 자신 개그맨이며 감독이며 영화배우인 그가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인해 온몸에 상처를 입고
심지어 개그맨이며 코미디언인 자신은 사고로 웃지 못하는 표정을 가지고도
많은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영화를 통해 폭력이 웃음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줄 정도의 괴짜 감독이다.
이 영화를 보기전 두가지 궁금증이 있었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인가?
감독이 말하고 싶은 의도는 무엇인가?
키타노 타케시는 반한파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한국을 무시하는 스타일이고,
최양일은 아다시피 진짜 한국인이지만 영화에선 오히려 아시아인임을 공공연히
내세우는 스타일이라 이 영화의 주제가 몹시 궁금했다.
서론이 길군
자 이제 영화속으로.
영화는 김준평의 아들 마사오(정웅)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1923년 어린시절 김준평은 고향인 제주에서 오사카로 이민을 오게된다.
영화는 곧 중년이 된 김준평이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는 화면으로 이어진다.
김준평은 집에 오자마자 김치를 찾고,
무표정하게 우적거리며 김치를 입에 씹어 넣는다.
아내는 혹시 김준평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까 미리 겁에 질려 몽둥이로 김준평을
뒤에서 공격하지만 김준평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식욕을 채운 김준평은 아내의 몸을 탐하고 강간을 하며 자신의 성욕을 채운다.
식욕과 성욕을 우악스럽게 한순간에 해결하는 김준평의 모습은 시종일관 되풀이된다.
다시 장면이 바뀌어 폭격으로 부서진 집을 그가 무단으로 점유하고 이때부터 어묵공장을 차리게 된다.
막무가내로 시작한 어묵공장은 가난한 조선동포들이 모여사는 마을에 일자리를 제공하게 된다.
가족은 물론 친척들 대부분이 일을 하며 공장을 운영해 나간다.
이때부터 영화는 가난한 재일동포의 역사와 피폐한 가족의 역사가 동시에 진행된다.
유일한 소통방식인 폭력을 휘두르는 김준평에게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 고통스런 생활이 시작된다.
어느날 강간을 통해 태어난 아들이 찾아오고,
누구에게도 돈을 주지않는 수전노 준평은 아들과의 격렬한 싸움을 통해 가차없이 내쫓고 만다.
또한 종업원에게도 과도한 잔업을 요구하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이어 고리대금업에 손을 대기 시작한 준평은 돈을 못 갚은 사람이 자살하게 만들 정도로
잔인하게 몰아붙인다.
가족은 물론, 친척들, 종업원들, 돈을 빚진 사람들 조차도 그의 당연스런 폭력에 희생되고
일상처럼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두번째, 세번째 부인등을 들이면서 가족의 고통은 심해져간다.
김준평의 딸 하나코는 아버지에게 툭하면 구타당하게 되고
구타를 피해 시집을 간 후에도 남편에게 학대받다가 자살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무기력하게 아버지의 만행을 지켜만 보던 그녀의 유일한 저항은 죽음이었다.
결국 부인도 암에 걸려 고생하다 죽고, 유일하게 사랑한 두번째 처는 뇌종양으로 고생하다
자신의 손으로 생을 마감하고
세번째 부인은 탐욕스러운 준평처럼, 약해진 준평에게서 돈을 빼앗아 달아난다.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그는 다시 탐욕스럽게 세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을 빼앗아
북한으로 도망가지만 결국 외롭게 삶을 마감한다.
영화보는 내내 이렇게 굴곡진 삶도 있을까 하면서도
너무나 당연스레 와 닿는 영화이다.
어찌보면 우리 과거속에 일상적으로 보아왔던 사람들과 가정폭력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했다.
충격적인 장면 2개.
하나는 준평이 찻잔을 깨뜨려 손목을 긋고 튀기는 피를 받아 채무자에게 먹이는 장면과
두번째처가 뇌수술후 1/5가량의 뇌가 제거된 모습.
특수효과가 어찌나 리얼하던지. 진짜인줄알았다. 대단해.
1천여 명에 달하는 제작진이 만들어낸 1950년대 오사카 거리와 조선인 마을속을
풀 쇼트로 꽉 짜이게 설계된 화면속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거리를 지키는 영상미는 정말 김준평이란 괴물을 철저히 묘사하고 있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에게 철저하게 과거를 고증해내고
그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겪으며 살아야 하는
조선인이면서 조선인이지 못한 사람들의 슬픈 삶을 여과없이 보여 주고있다.
이런 과정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있는 자체가 최양일이란 거장감독의 힘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간과한 것이 양석일이란 원작자였다.
물론 원작을 끈적할 정도로 다듬은 각본에도 참여한 최양일감독의 힘도 있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한 김준평은 '괴물'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지독히도 처절하고 악랄하게 삶을 산 인물이다.
또 하나 이 영화엔 어설픈 재패니즈드림이나 극적 클라이맥스를 두고 있지 않다.
키타노의 주된 연기인 차갑고 하드보일드한 세계관,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최양일식 다채로운 사람들의 나열이 아닌
원작의 힘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시종일관 차갑게 유지되는 인물간의 관계,
현실로만 느껴지는 격투신등
가족에 대한 굵직한 감독의 선이 느껴지는
노장 감독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영화란게 느껴진다.
김준평역의 기타노 다케시는 그가 말했듯이 '이 세상 누구와도 닮지 않은 그'를 잘 묘사했다.
오히려 기타노를 위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딸 하나코역의 타바타 토모코, 부인 김영희역의 스즈키 쿄카등 출연자 하나 하나
칭찬하지 않을 수 없도록 진지한 연기는 정말 대단하다.
2시간 20분의 영화가 끝나고 난 다음
엔드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관객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엔드크레딧 속의 스틸 사진속에는 굴곡진 가족들의 아픈 기억이 하나씩 담겨있었다.
영화초기에 궁금했던 한국영화인가라는 질문은
영화내내 한국 전통을 보여주는 따스한 시선으로 답해주었다.
그리고 6년에 걸쳐 완성된 작품을 통해 괴물 '김준평'을 굵게 묘사해냈다.
'피와 뼈'는 지난 2월 17일 제49회 마이니치 영화콩쿠르에서 일본영화대상,
남우주연상(기타노 다케시), 여우조연상(타바타 도모코)
등 4개 부문을 휩쓸었으며, 지난해 12월 열린 2004 닛칸스포츠 영화대상에서도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